
서론 - 불안 세대를 읽고 나서
회고록에서 갑자기 왜 책이 튀어나왔냐 싶겠지만, 24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몇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24년 회고록과 이어지게 되었다.
흥미롭게 읽어서 읽어볼 생각이 있으면 추천한다.
아동기 대재편에 대하여
선사시대 움집 마을부터, 2000년대 대도시까지 군집 생활을 하는 인간의 생활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동기(만 12세 미만)를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항상 같았다.
아동기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또래와 “놀이”를 하면서 보낸다.

놀이는 훌륭한 교육 체계이다
- 아이들의 놀이는 다양하고 복잡한 규칙이 존재한다. 때론 스스로 규칙을 만들기도 한다.
- 합의한 규칙을 어기면서 이기려고 하면 놀이에서 배제당한다. (더 이상 친구들이 끼워주지 않는다)
- 놀이 과정에서 서로 다툼도 발생하고 이를 중재하며 갈등 해결 방법을 배운다.
- 적당한 위험과 스릴을 감수하며 자신의 신체를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다
아이들은 현실세계에서 "적당한 위험"을 가진 놀이를 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의 도입과 함께 아이들이 현실세계에서 놀이를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과잉 보호와 인터넷 세계에서의 방임
아이들이 노는 장소를 설계할 때 목표는
“아이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보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10~12세(초 5 ~ 중1)의 아이들.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놀이터는 왼쪽 그림과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아파트 단지에 생기는 놀이터는 오른쪽 그림과 같이 지어졌다.
오른쪽 그림에서 보이는 요즘 놀이터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넘어가는 아이들에게는 시시하게 느껴진다.
이 또래 아이들은 이제 놀이터보다는 PC방과 오버워치 팀 보이스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 부모들의 과보호
- 예전엔 낮에 아이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부모들이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다.
- 뉴스와 미디어의 발달로 부모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 염려가 증가했고, 아동기 아이를 혼자 두는 경우가 매우 줄었다.
- 또한 아이들이 적당한 위험을 감수하며 놀만한 시설들이 사라졌다.
아이가 놀다가 다치면 책임을 물기 시작하는데 누가 굳이 위험한 놀이터를 지으려 하겠는가
- SNS와 인터넷, 온라인 게임의 발달
- 굳이 놀이터에 가서 놀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게임에만 들어가면 모든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 부모들의 입장에서도 아이가 밖에서 위험한 놀이를 하는 것 보다,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안전해보일 것이다.
실제로 아동기, 청소년기 아이들이 신체적,물리적 부상을 겪어 병원에 가는 빈도는 꾸준히 줄고 있다.
근데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
온실속 화초는 사실 병들어있다


아동기에 “위험”을 감수하는 경험을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우울증, 불안 장애를 겪을 확률이 증가한다.
전세계적으로 스마트폰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2010-2014년 무렵)부터
청소년기 우울증, 불안 장애 환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어린 시절에 작음 위험에 노출이 많이 되어야 나중에 훨씬 큰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
반면 어릴때 과잉 보호를 받은 아이는 위험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어른이 되기도 한다.
[불안 세대] 에서는 이를 "놀이 기반 아동기"에서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의 아동기 대재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최근 청소년 우울증, 불안장애의 급격한 증가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나는 스마트폰을 초등학교 5학년(만 10세) 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내 아동기의 대부분은 놀이 기반이었다.
놀이 기반 아동기의 마지막 탑승자
아마 우리 세대가 놀이 기반 아동기에서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 전환이 진행되던 세대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는 놀이터와, 운동장, 친구집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때부터 스마트폰이 생기기 시작했던 세대.
운이 좋은건지 안 좋은건지, 내가 자란 하남은 경기도 내에서도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 아니었다.
주변에 태권도나 피아노가 아닌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은 매우 드물었고,
주말만 되면 아침을 먹자마자 나가 동네 친구들을 모으고 해가 질때까지 동네를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 스마트폰을 처음 받았지만 놀이의 방법이 약간 달라졌을 뿐, 여전히 또래 친구들과 직접 만나 놀았다.
(친구들과 모여서 핫스팟 틀고 모바일 마인크래프트 멀티 하다가 데이터 폭탄 맞고 엄마한테 혼났었다.)
이러한 환경이 지금 생각해보면, 놀이 기반 아동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준 좋은 환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글짐 꼭대기를 올라가지 못했던 아이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매우 모범생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진짜다)
선생님이 하지 말라던건 어지간해서 안 했던 말 잘듣던 아이였다.
하지만 난 이게 내 천성이 착해서가 아닌 “겁이 많아서” 라고 생각한다.

초등학생때 학교 놀이터엔 정글짐이 하나 있었다.
난 저 정글짐 꼭대기를 올라가보질 못했다.
꼭대기에서 바로 아래칸까지 올라가고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어질까 무서워 더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왔다.
주변 친구들은 꼭대기에서 놀고 있는데 나만 아래서 부러운 눈으로 구경하곤 했다.
높은 곳만 무서워하는게 아니라 대체로 겁이 많은 아이였다.
병원에서 주사 맞을일만 있으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고, 공포영화는 포스터만 봐도 무서워서 눈을 돌렸다.
친구들과 경찰과 도둑을 할때면 누군가한테 쫒기는 상황이 무서워서 항상 경찰을 골랐다.
이렇게 겁이 많은 탓에, 나는 어린 시절에 모험을 겪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치원때 놀이터에서 그네 주변을 지나가다가 그네를 타고 있던 친구와 부딪힌 이후로, 그네 근처도 못갔다.
그래서 처음 그네를 탔던게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학교 운동장에 널린게 그네였는데 말이다.)
불안함이라는 흉터
다행히도 겁쟁이 소년은 청소년기를 거치고 나서 씩씩한 어른이 되었다.
바늘이 무서워 울던 아이가 이젠 봉사활동이 귀찮아서 제발로 헌혈을 하러 간다.
(그리고 씩씩한 어른이 된 댓가로 현역으로 군대에 갔다.)

그런데 어릴때 위험을 감수한 경험이 많이 없어서일까?
나이가 들고 겁은 사라졌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불안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특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갑작스럽게 닥쳤을때 내 안의 불안이가 폭주했다.
군대와 불안감
군대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훈련소 두 달, 그리고 자대에 가서 두 달 총합 4달 정도, 잠을 제대로 못 잤던 것 같다.
군대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규칙들이 모든 곳에 존재했으며,
그걸 어기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24시간 나랑 붙어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눈치를 봐야했고, 주변엔 친한 사람은 커녕 처음 보는 빡빡이들만 가득했다.
그래서 이등병, 일병 초 정도는 24시간 내내 조교와 선임, 간부들의 눈치를 보느라 너무 피곤했다.
근데 이러한 불안감이 항상 나쁘게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겁쟁이와 에이스는 한끝차이
24시간 눈치를 보며 사는게 나한테는 피곤했지만 군생활엔 도움이 많이 됐다.
선생님께 혼이 날까 두려워 모범생처럼 살았던 아이는, 군대에선 선임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 에이스가 되었다.
공군에서도 작은 부대였던 우리 부대는 흔히 말하는 '가라부대'였다.
애초에 할 일이 많지도 않았고, 대부분 사람들이 규정 같은것을 지키지 않고 대충대충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규칙을 어기면 돌아올 상황이 두려워 모든 규칙을 지키며 fm대로 살았다.
내 관물함과 자리는 전역 전날까지 꺠끗했고, 우리 부대 병사 80프로 이상이 쓰던 투폰은 시도할 엄두도 안냈다.
“이게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규칙을 어기다가 걸리면 혼날까봐 했던거여서,
주변 동기나 후임들은 규칙을 어겨도 놔뒀다. (걸려도 내가 혼나는거 아니니까)
근데 전역할때쯤 되보니까, 본인은 fm대로 살면서, 후임한텐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임들과 간부들도 나를 좋게 봐줬고, 중요한 일을 해야 할때 나를 찾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나름 군대에서 병사로 할 수 있는 감투를 많이 써봤던 것 같다.
(공군 출신은 알겠지만, 새내기 생활관장, 병사 자율위원회 등등 )
군대는 감옥이었나 울타리였나

나는 내가 군대에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열악한 사지방 환경에서 공부도 하고 프로젝트도 완성했다.
그 안에선 무얼 하든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는 것 같았다.
밖에만 나가면 모래주머니를 벗어 던지고 훨씬 빨리 뛸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작년 5월 말 전역을 하고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안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래주머니와 나를 감싸던 철조망이 사라졌지만, 정작 어디로 달려가야 할 지 몰라 가만히 서있었다.
군대에선 도전이란 걸 할 필요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자기 전까지 모든 시간을 통제하는 곳이다.
전역을 할때쯤, 오히려 매일 일상이 똑같은 군대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전역을 하고 나니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만 하다가 한 달이 지나갔다.
모래주머니가 아니라 갑옷이었나
감옥이라고 생각했는데 울타리였나.
전역,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6월 말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일단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야겠다 싶어 알바천국, 알바몬을 뒤졌다.
그리고 집 앞 메가박스에서 아르바이트생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전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관 알바를 한 번쯤은 해보고 싶어서 바로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오랜만에 다시 불안함이 드리웠다. 1년 반 전 이등병 시절 느꼈던 그 불안감.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지원서 자체를 쓰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원서를 제출한 날 밤부터,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영화관 아르바이트 경력이 아예 없는 나를 뽑아줄까?
- 영화관 아르바이트는 면접이 빡세다던데 얼마나 준비해야하지?
- 막상 갔는데 분위기가 안좋은 곳이면 어떡하지?
- 학기랑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 있을까?
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가기 전까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계속 들었다.
인터넷에서 영화관 면접 후기들을 찾아보고,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하며 준비했다
면접 보러 가기 전 날엔 새벽 4시까지 불안해서 잠을 이루질 못했다.
면접 당일엔 원래 보기로 한 시간보다 20분 일찍 가서 기다렸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는데 말이다.)
물론 이런 불안함이 앞서 말했듯 항상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불안함 때문에 오히려 철저히 준비를 해갔고 7명 중에서 1명 뽑는 면접에 당당히 합격했다.
나를 뽑아주신 매니저님이 나중에 이야기 해주셨는데
미리 준비한 보건증, 면접전에 20분 일찍와서 기다린 점 등을 좋게 보고 나를 뽑자고 하셨다고 한다.
작년 유일하게 후회하는 일

메가박스 알바를 하면서, 동기간에 처음으로 웹 개발 외주를 진행했었다.
외주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개강 전에 끝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군대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와, 이 외주를 포트폴리오로 CEOS에 지원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CEOS 지원 기간이 되니 불안함이 다시 드리웠다.
그리고 이번엔 지원서를 쓰지 못했다.
사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 외주가 예상 보다 마지막에 너무 일이 많아지고 바빠졌다. 이게 CEOS 접수 기간과 정확하게 겹쳤다.
- 또 학기 중에 GDSC 멘토를 하기로 결정했고, CEOS와 GDSC 멘토를 병행할 수 있을지 이 됐다.
그런데 결국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 제대로 면접을 준비할 시간이 없는데, 면접에서 쪽팔림만 당하고 오는건 아닐까?
- 지뎃씨 멘토와 CEOS 둘 다 잘 못하는건 아닐까?
주변에서 쎄오스 지원했냐고 물어봤을때 제일 먼저 대답한 이유는 외주가 바빴다 였지만,
사실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지원을 못한게 맞는 것 같다.
두려움과 후회
그리고 학기를 시작하고 나서 CEOS 신청을 못한걸 굉장히 후회하게 됐다.
생각보다 학기 중에 시간 여유가 꽤 있었고, 오히려 남는 시간에 뭘 해야할지 다시 길을 잃었다.
나는 왜 시도도 안 해보고 두려워했을까?
연합 동아리가 무슨 정시 원서도 아니고 떨어진다고 다른 리스크가 있었나?
이거 떨어진다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벌레보듯이 볼까?
전혀 아닌데 말이다.
도전해본다고 해서 손해 보는게 단 한가지도 없었는데, 오로지 두려움 때문에 시작을 못했다는 사실이 후회가 됐다.
학기 중 남는 시간에 유의미한 개발 공부를 하지 못해서 더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낯선 상황을 겪을때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한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는 것과 별개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두려워 회피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물론 지원했다고 무조건 붙는 건 아니지만, 작년 1년을 되돌아보며 유일하게 후회가 남는 점이다.
이제야 도전해보는 중
그래서 지난 2학기에 남는 시간엔 전공 공부에만 집중했다.
운이 좋게도 학점은 나쁘지 않게 받았지만, 개발 실력은 2학기 동안 전혀 늘지 않았다.
사실 디프만 몰래 지원하고 광탈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기말고사 기간에 모집 공고가 올라온 디프만에 지원했다.
내가 디프만을 뚫고 들어갈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원서를 쓰는 기간이 기말고사 기간과 딱 겹쳐서 지원서를 쓸 시간도 많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지원서도 안 넣어보고 후회를 하고 싶진 않았고,
GPT의 도움을 조금 받아 지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사실 제대로 된 기업이나, 개발 관련 동아리에 지원서나 이력서를 쓴 경험이 처음이었다.
결국 서류에서 광탈하긴 했지만 지원서를 쓰면서 나의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면접까지 갔다면 더 도움이 많이 되었겠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자 회사로
그리고 종강 이후에 회사에 가기로 결정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아는 A씨가 작년 2학기 쯤 부터 회사 인턴을 같이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조건은 1년 휴학 및 계약직 입사.
1년 휴학이라는 조건이 부담스러워 처음엔 거절했지만, 종강 이후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디프만 지원서를 쓰다보니 나의 부족한 부분이 뼈저리게 느껴졌고,
현업 1년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1년이라는 시간은 짧으면서 긴 시간이다.
이 1년을 잘못하면 흔히 말하는 ‘물경력’ 이라는 무의미한 시간으로 보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사실 내 실력이 회사에서 일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다가오는 기회를 놓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군대처럼 내 시간과 일정을 누군가가 통제하지 않는다.
울타리가 사라졌으니 나 스스로 길을 찾아 달려나가야한다.
25년의 목표
어떤 길을 가던 위험성이 없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리에 서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어릴때 내가 조금 더 겁이 없었더라면, 작음 위험을 감수해보는 경험을 해봤더라면,
지금의 내가 가진 두려움과 불안이 줄어들었을까?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릴 순 없다.
늦었지만, 두려움을 이겨내고 위험을 감수해봐야한다.
30대, 40대가 된다면, 선택 한번 한번의 위험성이 더 커질테니까
그래서 25년은 1년 휴학과 회사 입사라는 도전을 하며 시작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양한 도전을 해볼 생각이다.
겁 많았던 아이는 이제서야 어른이 되는 중이다.
위험하고, 무섭지만 정글짐 꼭대기에서 올라가서 본 놀이터 풍경은 더 아름답지 않을까?